한상열의사 추모비

한상열의사 추모비

  • 한상열의사 추모비

한상열의사 추모비

  • 주소 우천면 문암리
  • 관리 기획감사실 : 033-340-2225
  • 문의 -

기본정보

〈비 문〉 1876년 4월 2일에 강원도 횡성군 우천면 문암리에서 부친 한동수 공과 모친 연일정씨의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청소년 시절에 선생은 일제의 침략에 의한 주권 상실과 고종 32년 1895년의 을미의병을 보고 애국사상과 항일의식을 품게 되었다.

광무 9년 1905년에 일제의 병탄(倂呑) 야욕이 노골화되고 을사조약을 칙결(勅結)하자 이에 분개하여 민영환, 조병세 등 자결하는 인사들이 속출하더니 다음해에는 제2차 의병인 병오의병이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 때의 의병은 충청도의 민종식선생과 전라도의 최익현선생이 중심이 된 것이었다. 그러다가 다음해인 광무11년 1907년에 해외밀사 사건을 구실로 일제가 고종황제를 폐출하고 순종을 즉위시킨 후 정미 7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고 한국군대를 해산시키게 되자 마침내 전국적인 의병이 다시 일어나게 되었는데 이를 3차 의병 또는 정미의병이라 부른다.

이전의 을미의병이나 병자의병이 대체로 노장층의 유림지도자가 중심이 되었던데 비하여 정미의병은 해산된 구한국 군대가 중심이 된 것으로서 군사에 밝은 청년들이 앞장을 서는 의병이었기 때문에 왜병의 피해도 전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 그런데 정미의병은 원주 진위대 군사가 특무정교 민긍호를 중심으로 무기를 들고 일어나 왜병과 전투를 벌인 후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이때에 선생은 32세의 청년으로 이웃고을에서 일어남을 보고 자신도 의병을 일으켜왜적을 몰아내기로 결심하고 의병 200여명을 모아 지평, 홍천, 원주, 평창, 영월 등지에서 적을 공격하여 다수의 왜병을 죽이고 무기와 탄약등을 노획하였는데 왜적과의 교전이 수백 회이며 군사가 많을 때에는 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특히 1908년 2월에는 홍천에서 왜군 대부대와 크게 접전을 벌여 이를 격퇴시키니 이에 분노한 일제는 4월 2일에 횡성의 일본수비대를 파견하여 홍천군 월운리 서북후동에 은거하던 선생의 가족을 납치하여 놓고 선생에게 귀순하라고 회유와 협박을 다하였으나 선생은 이에 굴하지 않고 오히려 부하를 거느리고 그들의 횡성 본거지를 습격하여 왜적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이후로 일제의 계획적인 대 진압 작전으로 의병의 피해가 커지면서 정미의병은 점차로 해산하게 되었다.

경술국치 후 선생은 국내에서 항일투쟁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3ㆍ1운동 다음해인 1920년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투사들과 힘을 합하고 대한의용부 참모로 활약하였으며 1926년 2월에는 대한독립단 참모로 취임하여 항일 두쟁을 계속하던 중 그해 9월 19일에 민족진영의 분열과 그들의 주도권 장악을 노린 좌익단체의 흉탄에 맞아 돌아가시니 향년 51세였다. 선생의 시신은 동지들이 만주 길림성 혼춘현 산채구에 권조(權厝)하고 아직도 독립된 고국에 반장(返葬)하지 못하여 그 혼백이 만리 타국에 머물고 있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라 하겠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애국정신과 항일 투쟁의 공로를 표창하기 위하여 1962년에 건국공로훈장을 추서 하였다.

이제 선생의 장손 재진씨가 선생의 묘소를 고국으로 반장치 못함을 절통히여겨 그 추모의 정을 만분의 일이나마 위로하고자 선생의 고향마을에 이 비를 세우니 선생의 혼백은 이 돌에 의지하여 고국으로 돌아오기를 빌고 또 빈다.
1993년 6월 26일 근립 의사 추모비 건립추진위원회 위원장

관광지정보

  • 주소 : 우천면 문암리
  • 이용요금 :
  • 이용시간 :

교통/주차

찾아가는길

영동고속도로→새말나들목→좌회전 우천면사무소→ 군도 10호선 3km

주변정보

반경 선택

반경 선택 현위치 기준 :      
  • 블로그 정보가 없습니다.

담당자
기획감사실 문화예술담당 ( ☎ 033-340-2225 )
최종수정일
2016-04-19 17:30:23
만족도 조사

현재 열람하신 페이지의 내용이나 사용편의성에 만족하십니까?

평가: